철학!?
철학! 참 거시기하죠?
철학이 없다고 하는 말은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살 수는 없지만 깊이 고민하지 않고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산다는 이야기이죠. 아무렇게 산다는 말은 결국 책임감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면 철학 없이 사는 사람은 인생을 책임감 없이 산다는 말이 됩니다. 인생을 책임감 없이 살아가니 인생이 아무렇게나 되고 특별한 운이 따르지 않는 이상 만족할만한 삶을 살아가기는 힘들 겁니다.
그럼에도 철학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철학을 가지고 산다는 말이 학문으로서의 '철학'을 가리키는 건 아닐 겁니다. 그건 좀 더 명확히 말하면 자기 주관이나 원칙 없이 산다는 이야기일 겁니다.
그럼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무엇이고 그것은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요? 그전에 철학은 언제 생겨났는 지를 먼저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언제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아야 철학이 우리 삶과 어떤 관계인지를 파악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무언가 필요에 의해서 생겼을 테니까요. 필요는 우리 삶에서의 필요입니다. 그러니 철학이 왜 생겼는지를 아는 것은 철학이 우리 삶과 어떤 관계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죠.
탈레스. 신화를 걷어 내다.
통상 철학을 처음 시작한 사람은 탈레스라고 합니다. 왜 탈레스를 철학의 시조라고 할까요?
탈레스가 살던 오래전, 아마도 BC 6백 년 즈음에는 철학이 없었습니다. 아니 학문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의 사람들은 세상, 즉 자연을 해석할 수 없었습니다. 자연과학적 지식이 거의 전무했을 테니까요.
추측컨데 그들은 자연현상을 신과 연결 지었을 겁니다. 천둥 번개가 치면 하늘의 신이 노한 것이고 쓰나미가 밀려오면 바다의 신이 노한 것이죠. 그들에게 자연은 감히 손댈 수 없는 경외와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자연은 그들에게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고, 알 수없기에 예측과 통제를 할 수 없으며, 그렇기에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죠.
이때 사람들 앞에 나타나서 천둥, 번개가 치는 것은 하늘의 신이 노한 것이 아니라 자연현상일 뿐이고 그것은 생명과 감정이 없는 현상일 뿐임을 가르쳐 준 사람이 탈레스였습니다. 즉 세상을 신화의 관점에서 과학의 관점으로, 신의 개입에서 인간의 해석으로 바꾼 것이죠. 중세 시대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보다 더 큰 전환이었을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천둥이 치고 비바람이 거센데 이게 신이 노한 것이 아니라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된 겁니다. 다만 비바람이 거세니 담장을 튼튼히 하고 대비하면 그만인 것이죠.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된 겁니다. 또 신의 노여움이라고 하면 언제 그런 일이 닥칠지 모릅니다. 그저 두려운 마음으로 신이 노하지 않기만을 바라고 제사를 드릴 뿐이죠. 그런데 신이 노한 게 아니라 자연현상이라고 하니 이제 대비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연을 관찰해서 언제 쓰나미가 올지를 예측하는 노력을 하게 되는 것이죠. 이제 인간은 자연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하고 이용하는 단계로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신화에서 과학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죠.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
그럼 탈레스는 무어라 말했기에 철학의 시조가 된 걸까요? 그는 <만물의 군원은 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전까지는 만물은 신이 만든 창조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적 존재가 우주 만물을 만든 것이 아니라 물에 의해 저절로 만들어졌다고 한 것입니다. 매우 매우 불경한 말이었겠지만 이 말로 인해 탈레스는 철학의 시조가 되었고 인간의 지성이 철학이라는 금자탑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와 기독교의 성경에 나오는 창세기, 그 외에도 이집트 신화나 중국의 반고 신화, 우리나라의 마고 신화 등등 세계 거의 모든 나라들은 창조신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창조신화에는 만물을 창조한 신이 있기 마련입니다. 신이 아니라도 어떤 신적 힘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본 것입니다. 기독교 같은 일부 종교를 제외하고는 그런 신화들은 대부분 자연을 의인화한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자연을 의인화했다기보다는 신을 이해하기 쉽게 의인화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그리스 신화는 태초에 카오스가 있었고 여기서 하늘과 대지의 신이 나오고 사랑의 신, 어둠의 신 등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들이 서로 결합 작용을 하여 차차로 만물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런 생각을 탈레스가 깨버린 것이죠. 신은 무슨 개뿔!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 신이 아니라 물에서 세상 만물이 나왔을 뿐이라고!!
이렇게 말한 겁니다. 아마 그 당시 사람들은 매우 놀랐을 거 같습니다. 세상의 근본 전제가 바뀌어 버렸으니까요.
그래서 탈레스를 철학의 시조라고 하는 겁니다. 자연을 경외의 대상에서 인간의 인식권 안으로 끌어들인 것입니다. 두려움의 대상에서 연구의 대상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죠.
그 덕분에 철학자들이 뒤이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데모크리토스는 만물은 원자로 되어 있다고 하고, 아낙시메네스는 공기,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이라고 했습니다. 탈레스 덕에 자연을 신적 존재가 아닌 자연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자연이 신적 존재라고 하면 인간의 할 일은 그저 경배하고 두려워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물이나 불, 공기 등이라고 생각한다면 인간의 할 일은 연구하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탈레스 이후에 자연과 우주를 경배하는 게 아니라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 지식들이 쌓여서 학문적 체계를 이루게 되는 것이죠. 인간은 자연에 대해 수동적인 삶에서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삶으로의 이행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탈레스가 철학의 시조라 불려도 이의를 달 수는 없습니다.
사실 현대에 비해 탈레스 당시의 과학적 지식은 매우 조잡하고 틀린 부분이 많습니다. 물론 수학적 기초는 당시에 세워졌고 과학적 지식도 현대 지식의 토대가 되고 있지만 그 수준이나 정확성은 현대에 비할바는 못됩니다. 그럼에도 세상을 진지하게 고찰하고 해석하는 태도는 현대인이 따라가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탈레스 일화
탈레스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하루는 그가 하늘을 연구하느라 고개를 들고 하늘만 쳐다보고 가다 발 밑의 웅덩이에 빠졌습니다. 마침 그곳을 지다던 나이 든 하녀가 그를 조롱했습니다. 자기 발밑도 못 보면서 하늘은 왜 쳐다보냐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또 어떤 때는 그의 친구가 철학을 해서 뭣하냐고 하자 철학자도 돈을 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자기가 여행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돈을 벌어보라고 야유를 보냈습니다. 탈레스는 자기 말을 증명하기로 마음먹습니다. 하늘을 연구했기에 바람을 보고 다음 해 올리브가 대풍이 들것을 예상했습니다. (참고로 그는 인류 최초로 일식을 예언하기도 했고 수학을 이용해 피라미드의 높이도 계산했다고 합니다.) 그는 올리브기름 짜는 기계를 빚까지 내어가며 다 사들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에 정말로 올리브가 대풍이 들었습니다.
자, 이제 올리브기름을 짜야하는데 기름 짜는 기계는 모두 탈레스가 가지고 있었죠. 할 수 없이 사람들은 예년보다 비싸게 탈레스에게서 유착 기를 빌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탈레스는 빚을 모두 갚고도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철학자도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통쾌하게 증명했습니다.
2천6백 년 전의 탈레스가 던진 질문이지만 지금도 유효한 질문입니다. 만물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탈레스는 연구 끝에 물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라 대답해야 할까요? 전자로? 양자로? 쿼크? 그런 고민은 물리학자들에게 맡겨도 됩니다. 우리가 탈레스에게서 이어받아야 하는 것은 치열한 생각이 아닐까 합니다. 그처럼 우리도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합니다. 질문 내용은 다르겠지만요. 어떻게 사는 게 바른 삶인가? 삶의 길목마다 마주치는 문제들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문제의 근원은 무엇인가 등등으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