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이 있어 옮겨 본다.
요즘 이십 대 초중반 여성의 패션에서 눈에 띄는 점이 있다. 전에는 잘 몰랐는데, 네댓 살 간격으로 패션에서 확연한 차이가 느껴진다. 스무 살 전후 여성들, 이른바 알파세대는 배꼽을 드러내는 짧은 상의가 도드라진다. 이십 대 중반, 즉 Z세대는 상의를 모아 바지 안에 넣어 허리를 잘록하게 하고 다닌다. 내가 제대로 묘사했는지 모르겠으나, 거리를 걷다 보면 이 차이가 확연하다. 알파세대는 차별화에 성공했다.
젊은이들의 버릇없음
기성세대의 기득권에 대해 말들이 많다. 먼저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그런데 역사를 돌아보자. 어떤 세대도 스스로 기득권을 내놓았던 적이 없다. 기득권의 성채를 부수고 권리의 일정 부분을 쟁취하는 일은 항상 뒷세대의 몫이었다. 이 점에서 예외를 찾기 힘들다.
역사를 통틀어 요즘 젊은이들은 버릇이 없었다.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다는 말이 있다. 비슷한 내용이 수메르 점토판에도 적혀 있다고 한다. 최근 뉴욕 컬럼비아대와 하버드대 연구진은 지난 70년 동안 세계 60개국의 설문조사를 분석해서, 젊은이들이 과거에 비해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는 인식은 인류사를 관통하는 '오래된 착각'이었다고 네이처네 발표했다. 인간의 모든 세대는 다음 세대의 버릇없음을 한탄하지만, 버릇없음이야말로 기득권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나온 단말마의 외침이었다.
버릇이 있다는 건 기성세대의 기준과 규범을 잘 따른다, 즉 고분고분하다는 뜻이다. 요컨대 자기 세대만의 차별성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기성세대의 자장에 포섭되어 자기 세대만의 고유성이 없게 된다. 전적으로 흡수 통합이다.
눈여겨봐야 할 건, 그다음 세대가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든 세대는 자기만의 버릇없음이 있고, 결국 앞 세대를 치받고 올라오기 마련이다. 김수영은 이어령을 비판하면서 자기 세대를 만들어냈다. '참여문학'과 '순수문학'이라는 명칭을 발명하면서 차별화에 성공했다. 패션에서 알파세대가 Z세대와 스스로를 차별화한 사례도 한 증거다.
느리게 자살하는 세대
만일 한 세대가 기성세대의 규범 아래 머물며 다음 세대에 의해서 비로소 차별화되면, 그 세대는 역사에서 통째로 사라질 수도 있다. 말 그대로 증발하고 마는 것이다. 생물학적으로는 존속하겠지만, 문화적으로는 존재감을 발휘하지도 남기지도 못할 테니 말이다.
어느덧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입장에서, 아래 세대가 제멋대로 굴고 버릇없어 보이는 것을 반겨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야말로 살아있음의 징표일 테니 말이다. 오히려 말을 잘 듣는 것을 걱정해야 할 것이다. 길게 보면 변종을 낳지 못한 것이기도 하다.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양성이다. 이 시대에 많은 변종과 변칙이 생겨나서, 그중에서 다음 시대의 환경에 어울리는 놈이 있게 되면, 생명은 지속한다. 다른 것이 다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생명은 다른 것을 포용하는 힘이다.
얼마 전에 이런 질문을 받았다. 그렇다면 파시즘 같은 '다른 생각'도 포용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요? 얼핏 그럴듯해 보인다. 하지만 파시즘은 다양성을 부정하기 때문에 그저 또 하나의 '다른 생각'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파시즘은 다양성을 억압하고 배제한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만이 다양성의 일원일 수 있다.
세대의 관점에서 보면, 버릇없지 않은 세대는 자기 소멸로 향한다. 느린 자살이다. 기성세대에게 묻자. 당신은 다음 세대가 느리게 자살하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생명의 약동에 못 이겨 펄쩍펄쩍 튀어 오르길 바라는가? 다만 당신이 살아있다면, 그건 차별화에 성공한 덕이라는 점을 명심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