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퇴조왈 상인호. 사람이 다쳤느냐

 

마구간이 불탔을 때 공자는 조정에서 나와
"사람이 다쳤느냐?" 하고만 물어보고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어느 날 마구간에 불이 났는데 공자는 다친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기만 할 뿐 말에 대해서는 묻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논어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말 한 마리 값은 꽤 나갈 겁니다. 2천 년도 더 훨씬 전에 살았던 공자 시대는 더욱 비싸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 귀한 말이 있는 마구간에 불이 났으니 일차적으로는 말이 멀쩡한 지 걱정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공자는 다친 사람이 있는 지만 물어보고 정작 불이 난 마구간에 있던 말에 대해서는 묻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요즘 동물보호단체에서 들었다면 한 마디 했을 수도 있을 거 같네요.

 

 

물론 공자가 말의 생명을 경시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동물의 생명이라고 우습게 보는 분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보다는 사람이 먼저라는 이야기일 겁니다. 모든 생명이야 동일한 가치를 지니겠지만 사람의 입장에서는 사람이 더 중요한 건 어쩔 수 없습니다. 모든 이들의 인권과 생명이 존귀하지만 내 가족의 생명이 더 중한 건 어쩔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겠지요.

 

쿠팡 물류 창고에 큰 불이 났었습니다. 덕분에 귀한 소방대원 한 분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어제는 배달 음식 갑질에 스트레스받은 점포 주인이 쓰러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는 기사도 있었습니다.

 

 

생명을 중시한다고 사람의 생명이 귀하다고 말하지만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습니다. 직접적으로 살해를 하지 않으니 죄가 없다고 또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또는 그 사람이 그리 될 줄 몰랐다고 하는 말들은 모두 변명일 수 있습니다.

 

정말로 상대를 나와 같은 생명체요 존귀한 존재라 생각한다면 이른바 '갑질'이란 건 없을 겁니다. 갑질을 당하면 기분 나빠하면서, 그리고 방송에서 누가 갑질 했다는 소리를 들으면 격분하면서 실상은 경비원에게 갑질 하고 종업원에게 갑질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요? 아니 얼마나가 아니고 우리 모두 거의 그런 경험이 있을 거 같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갑질을 한 적이 분명 있을 겁니다.

 

이건 평소 생명에 대한 타인에 대한 사랑의 부족에 기인합니다. 사랑은 성품의 문제입니다. 지식이라면 후천적으로 획득할 수 있으나 성품의 문제는 후천적으로 획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습관과 성격은 변하기 힘든 것이겠지요.

 

지식의 확충은 교육으로 얻을 수 있으나 성품이 변화는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깨달음은 쉽게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갑질 하는 인간이 계속 나오는 것일 겁니다. 성품은 지식교육이 아닌 윤리 교육이나 종교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물론 성과는 미미합니다.

 

기기가 아닌 인간 성품의 진화는 언제 이루어질까요? 빨리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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