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사는 서대문에 안산이란 산이 있습니다. 무악재 고개에서 인왕산과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산입니다. 산의 기개와 품격은 인왕산에 미치지 못하지만 서대문 인근에 사는 사람들에겐 포근한 산입니다. 유년 시절을 신촌 기차역 부근에서 보낸 저에게도 그 산은 내가 아는 산 중에서 가장 친밀한 산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그 산을 안산이 아닌 새절이라 불렀습니다. 그때 인근에 사는 사람 중에 안산이라 부르는 사람은 보질 못했습니다. 다 이 산을 새절이라 불렀지요.
다른 산들은 이름 끝에 무슨무슨 산이라고 '산'자가 붙는데 유독 새절만 '산'자가 안 붙어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은 있습니다. 아무튼 장성하기까지 새절이라 불렀습니다. 사실 산에는 <봉원사>라는 절이 하나 있긴 한데... 어릴 적에 가보면 절간에 그려진 탱화들이 오래되어서 이 절이 새절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뭔가 산 이름하고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했던 거 같습니다.
그리고 잊고 살았는데... 몇 해전 새절 근처로 이사를 왔습니다. 동네 뒷산이 새절입니다. 그때서야 왜 산 이름이 새절인가 인터넷으로 알아보았습니다. 찾아보니 새절은 <봉원사>의 별칭이었습니다.
봉원사는 신라 시대에 세워진 사찰인데 조선 효종 때 소실되어 영조 때 다시 중건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새로 지은 절이라 새절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말이 새절이지 사실 꽤 오래된 절입니다. 그리고 새절 새절 하다가 산 이름까지 아예 새절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산 정상에는 봉화대가 있습니다. 봉화는 평안도에서 시작하여 안산의 봉화대를 거쳐 남산으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봉화대는 거의 가지를 않습니다. 꼭 꾸역꾸역 정상에 오르는 게 싫어서입니다. 그저 잘 조성된 안산 자락길을 따라, 또는 자락길에서 벗어나 숲 속 오솔길을 찾아 걸어 다닙니다.
산은 정복하려, 이기려 오르는 것이 아니라 그 품에 안기기 위해 오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산 정상에서 맛보는 정복감이나 자기를 이겼다는 승리감도 좋긴 하지만, 산 자락을 따라 유유히 걸으며 산을 음미하는 것도 꽤 괜찮습니다. 그러면 산이 날 포근히 감싸 안아줍니다.
그래서 저는 주로 산 중턱까지만 오르고 이후는 오솔길을 찾아 걷거나 자락길을 따라 걷는 걸 좋아합니다. 그러면 힐링도 되고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합니다.
무리 없이 걸으며 연세대 쪽으로 내려가면 봉원사가 나옵니다. 이 절에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 탑이 있습니다. 스리랑카에서 모셔왔다고 합니다.
봉원사로 내려가지 않고 계속 걸으면 홍제동으로 내려가는 쪽이 나오고 더 계속 가면 연희동 쪽으로 이어지며, 좀 더 가면 다시 봉원사로 이어지고 거기서 조금 더 가면 연세대와 이화여대 뒷 길 쪽으로 이어져 서대문구 일대를 한 바퀴 돌게 됩니다.
어릴 적엔 없었지만 자락길을 잘 조성해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편하게 산책을 즐길 수 있습니다. 이런 산이 서울에도 웬만한 동네마다 이어져 있으니 참 서울은 축복받은 도시입니다.
어릴 적에 이 산에 형과 함께 갔다가 스라소니와 마주친 적도 있었습니다. 꼭 호랑이 닮은 갈기와 무늬를 했는데 호랑이보다는 작았습니다. 그래도 한눈에 봐도 맹수여서 우리를 덮치면 그야말로 꼼짝없이 죽었다 생각했는데 다행히 잠시 보다가 그냥 가더군요. 사실 이전에는 안산에서 스라소니를 보았다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도봉산이었던 것도 같습니다. 하도 오래된 옛날 일이라 정확히 기억이 안 나네요.
이번 주말도 안산 자락길에 올라 호젓한 시간을 보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