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삐용과 드레퓌스
영화 빠삐용을 아실 겁니다.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한 번쯤은 보셨을 겁니다.
빠비용이 감옥에서 몇 번의 탈출을 시도하다 마지막으로 끌려간 곳이 악마의 섬이었습니다. 높은 파도와 상어로 인해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 못한다는 섬이었습니다. 그래서 섬 자체가 교도소로 쓰였습니다.
영화의 한 장면입니다. 섬에 끌려간 빠삐용이 어느 돌무더기에 앉으려 하자 그 섬에 먼저 와 있던 어느 죄수가 지나가다 거기에 앉지 말라고 하면서 한 마디 합니다. "거기는 드레퓌스 대위의 벤치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드레퓌스는 누구일까요?
드레퓌스는 프랑스 군의 대위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악마의 섬에 갇히게 됩니다. 이후 그 일로 인해 프랑스는 혼돈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이를 드레퓌스 사건이라 합니다. 드레퓌스 사건은 근대 프랑스의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아마 대혁명 이후 가장 큰 일이었다 해도 과언은 아닐 듯합니다.
드레퓌스 사건
1884년 드레퓌스는 독일에게 정보를 넘겨주었다는 간첩 혐의로 군사 재판에서 종신형 판결을 받고 '악마의 섬'에 갇히게 됩니다. 그때는 섬에 드레퓌스와 간수 몇 명만 있었다 합니다.
그로부터 40여 년 후에 빠삐용이 그 섬에 갇히게 됩니다. 그런데 드레퓌스 사건이 왜 큰 문제였을까요?
그걸 알려면 당시 프랑스의 상황을 보면 됩니다. 당시의 프랑스는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자존심에 상처를 심하게 입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드레퓌스 대위가 다른 나라도 아닌 독일에게 기밀을 넘겨주었으니 종신형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일로 인해 드레퓌스는 조국을 배신한 유대인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졌고 그의 종신형은 당연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드레퓌스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사실 혐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진범이 따로 있었으나 군법정은 이를 무시해 버렸습니다. 무시한 정도가 아니라 진범을 재판하라는 소리에 마지못해 재판을 열고는 오히려 진범에게 무죄를 선고해 버립니다.
독일에 대한 반감과 그가 유대인이라는 것이 더해져 저급한 민족주의 열풍의 희생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의 힘은 강합니다. 그를 아는 가족과 지인들 그리고 지식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결정적으로 드레퓌스 사건의 진실을 세간에 알리고 판결이 뒤집히게 한 사람이 바로 인류 최대의 불효자(?)인 에밀 졸라였습니다.
이후 그 사건은 개인의 사건이 아니라 프랑스 전체의 사건이 되어 버렸고 집단 광기와 진실의 대결이 되어버렸습니다.
에밀 졸라. 나는 고발한다!
에밀 졸라는 1898년 1월 13일 <오를>지에 이 사건의 진상을 말하며 대통령에게 공개서한 식으로 논설을 발표했습니다. 이 글이 바로 그 유명한 <나는 고발한다>였습니다.
그는 이 글에서 드레퓌스 재판이 얼마나 잘못됐으며 진범이 누구이며 그의 죄목이 무엇인지를 조목조목 밝혔습니다. 그리고 자기 삶에서 그동안 쌓아온 명예와 권위를 걸고 드레퓌스는 무죄라고 소리쳤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의 진상을 은폐시키는 데는 보수 정치인들과 군부, 심지어 교계까지 합세하였습니다.
그들의 의도는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의 힘을 다시 모으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지만 결국은 저급한 국수주의와 반유대 성향의 보수 교계가 만들어낸 기형아였을 뿐입니다.
결국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 드레퓌스는 1899년 9월에 다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대통령 특사로 석방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루한 법정 싸움 끝에 1906년 최고재판소로부터 드디어 무죄 판결을 받게 됩니다.
이후 그는 군에 복직하고 승진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를 위한 투쟁의 대열 가장 앞에 서 있던 에밀 졸라는 1902년 9월 29일 그의 무죄 판결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습니다.
시대의 광기, 광기의 시대
이상이 대학 시절 읽었던 드레퓌스 사건의 내용입니다. 이 사건이 요즘 한강 대학생 사건과 맞물리며 떠 올랐습니다. 어느 쪽이 맞다는 게 아니라 이쪽이든 저쪽이든 집단 광기 비슷한 것이 보이기 시작해서입니다.
지난 토요일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았습니다. 결론은 동의하는 쪽이지만 방송 내용은 우려스러웠습니다. 매우 한쪽으로 치우쳤기 때문입니다. 그런 방송은 의혹의 해소보다는 증폭의 도화선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오늘 인터넷을 보다 보니 이전까지와는 다른 흐름이 있네요.
이전에는 의혹을 제기하고 그에 동조하는 글이 대부분이었는데 이제는 갑자기 흐름이 바뀌었습니다. 이제 그만해라. 취해서 스스로 물에 들어간 거다. 하는 식의 말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하루아침에 이렇게 바뀔 수가 있는지 좀 의아스럽습니다.
친구 A를 의심하는 쪽에서는 연일 친구 A를 범인으로 기정 사살화해서 각종 영상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의심이 갈 뿐 아직은 범인은 아닙니다. 추정을 사실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범인이 아니라는 쪽에서는 제대로 된 답변은 없이 아니라고만 하는 것 같습니다. 의혹을 풀기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을 보여야 할 텐데 그보다는 변호사 선임 등의 일에 집중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의혹을 키운 것도 있습니다. 의혹이 난무하는 곳에서는 집단 광기가 발동할 수 있습니다.
추정을 사실로 받아들일 때 광기가 시작된다.
그 어느 쪽이든 당사자 본인이 아닌 상태에서는 사실을 모릅니다. 추정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추정들이 기정사실로 만들어져 이쪽과 저쪽 모두 서로 자기가 맞다고 무조건 주장하는 형국이 돼가고 있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추정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 자체로 오류이면서 부작용을 발생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작용이 심해지면 광기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증명되지 않은 사실이기에 서로 자기주장이 옳다 하면서 유, 무형의 폭력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에서 그러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때로 사회는 광기에 휩쓸립니다. 다수가 꼭 정의가 아닌 것입니다. 독일의 광기는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공산주의와 일부 이슬람 등 종교의 광기는 수많은 사상자를 낳았습니다.
광기가 아닌 열기여야 합니다. 열기와 광기는 다릅니다.
둘 다 사회정신의 단면을 보여주지만 열기는 역사의 수레를 앞으로 굴리는데 반해 광기는 뒤로 후퇴시킵니다.
촛불은 광기가 아니라 열기였고 그 훨씬 전에 1987의 함성도 열기였습니다. 2002년 월드컵도 열기였습니다.
열기는 국민들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광기는 정치인들에게서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 이 시대 우리의 모습이 열기인지 광기인지 잘 분별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