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은 부끄러운 일이다. 논어의 한마디

 

속으론 화나는데 겉으로는 행복한 듯이 표정을 짓고, 속으로는 슬픈데 겉으로는 즐거운 표정을 지을 수 있습니다.

또한 속으로는 미워하는데 겉으로는 좋은 척할 수도 있고, 속으로는 복수의 칼을 갈면서 겉으로는 친한 척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솔직하지 못한 것일 수 있습니다. 공자는 그렇게 겉과 속이 다른 것을 부끄럽다 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로또에 당첨되어 너무나 좋아 죽겠지만 있는 곳이 장례식장이나 병원에 문병을 간 것이라면 그 즐거움을 표현하는 것은 대단한 실례요 무례일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누군가 미운 사람이 있다 해서 싸움을 벌이는 건 다른 모든 사람을 무시하는 일일 수 있습니다.

 

이런 행동을 하면 안 된다고 공자도 가르쳤습니다. 이른바 극기복례, 자기를 죽여 예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죽인다는 것은 자기감정을 죽이고 예를 갖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로또에 맞아도 장례식장에선 경건해야 합니다. 그런 예가 없으면 사람으로 인정받기 힘듭니다. 그런데 공자는 왜 겉과 속이 다른 것을 부끄럽다 했을까요? 속이 어떻든 사회적 예는 지켜야 하는데 말입니다.

 

 

물론 공자가 예의를 무시하라고는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예를 지키려 자기 속을 누르는 것과 감추는 것은 다릅니다. 공자가 말한 극기복례는 자기를 누르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공자가 부끄럽다고 한 것은 감추는 것입니다.

감추는 사람은 뭔가 꿍꿍이라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게 아니라도 나중에 다른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뒤통수치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누르는 사람은 타인을 위해서이지만 감추는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둘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공자는 후자를 경계한 것입니다.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런 행동도 불사해야 할 때가 있을 수도 있을지 모르나 대부분의 경우 그런 행동은 성품에 관계됩니다. 같은 일을 당해도 그러지 않는 사람도 있고 그러는 사람도 있습니다. 결국 성품이 중요합니다. 

 

성공을 최우선으로 하는 시대이기에 성품은 뒤로 밀리고 있습니다. 부끄러움이 쌓여가는 세상이 될까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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