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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산 동네이다 보니 좋은 것도 있다.
바로 산이 가깝다는 것이다. 오늘 더위도 한풀 꺼여서 오랜만에 뒷산에 올랐다.
뒷산은 안산이라고 서울에서 산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알만한 곳이다. 연세대와 이화여대 뒤 편을 둘러쳐 있는 산이다.
거기서 둥그렇게 돌면 연희동과 홍제동으로 이어지고 무악재 쪽으로 해서 한 바퀴가 된다.

예전엔 새절이라 부르고 다녔다. 신촌과 아현동 인근에 살았던 분들이라면 안산보다는 새절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할 것이다. 어릴 때는 산 이름이 왜 새절일까, 보통 무슨 무슨 산이라고 하는데 새절엔 '산'자가 안 붙어서 이상하게 생각한 적이 있다.

나중에 커서 알았다. 그 산에는 봉원사라는 절이 있다. 그 절이 생겼을 때 새로 지은 절이라 하여 새절이라 부른 것이 그만 그 절이 있는 산의 이름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정식 명칭은 안산이다. 물론 이 안산이라는 이름이 언제 생겼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찾아보면 나오겠지만 귀찮다. 안산이라는 어른이 되어서 들은 이름이고 어릴 적부터 30대까지는 그저 새절로만 알고 있었다.

(새절이라 하여 지어진 지 얼마 안 되는 절이라 생각하면 오산. 신라시대에 지금의 연세대 자리에 지어진 천년고찰이다. 임진왜란 때 일부 되어 중건 되었으나 또 일부 소실되어 조선 영조 때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새절'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안산을 서대문구가 개발하여 지금은 많이 바뀌었다. 자락길이라 하여 나무 산책길을 만들었다. 나무 데크 길을 따라 걸으면 크게 힘들이지 않고 산 허리를 따라 산을 한 바퀴 돌 수 있다. 시간은 2시간 정도 걸린다. 물론 산의 이곳저곳을 부면서 걷는다면 3시간을 넘길 수 있다.

안산에 있는 쉼터에 조성된 서시다. 서시.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죽는 날까지 바라다니... 감히 그런 바람을 가질 수 있다니. 윤동주 시인. 도대체 그는 얼마나 순수한 사람이었기에 그런 바람을 가질 수 있었을까?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다니... 도대체 그는 얼마나 무죄하기에 바람에 흔들리는 잎새 소리에도 괴로워할 수 있었을까? 그 영혼의 순수성을 누가 따라갈 수 있을까?

오죽했으면 중국마저 윤동주 시인을 중국인으로 만들려고 할까.

잎새에 바람 소리. 그 소리에 괴로워하는 시인. 시인은 그 소리를 부모님 발자국 소리로 들었을까? 그래서 시인은 자식 노릇 못함을 괴로워했을까?

잎새에 이는 바람 소리. 그 소리에 괴로워하는 시인. 시인은 그 소리를 조선 백성들의 발자국 소리로 들었을까? 그래서 시인은 조국의 독립에 기여하지 못하는 자신을 괴로워했을까?

잎새에 이는 바람 소리. 그 소리에 괴로워하는 시인. 시인은 그 소리를 죽음의 사자의 발자국 소리로 들었을까? 그래서 시인은 살아서 부모님을 위해, 민족을 위해, 시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에 괴로워했을까?

그 괴로움의 일만 분의 일이라도 닮고 싶다. 아니, 일만 분의 일만큼 닮은 척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무지개가 떴다. 대전에 무지개가 떴다.
무엇을 반기는 무지개인가? 무엇을 축하하는 무지개인가?
누구는 떠나고, 누구는 도착하는 기차역인.. 만나고 떠나는 자리 기차역.
만나기 위해 떠나기도 하고, 떠나기 위해 만나기도 한다.
무지개는 과연 누구를, 어느 쪽을 축복하고 있을까?

노아에게 약속의 증표로 보여주신 무지개다. 그래서 무지개를 보면 누구나 좋아한다.

무지개는 비 온 뒤에 보인다. 비가 내려 괴로운데 그 괴로움을 지나면 무지개가 있다.
무지개는 축복이 아니라 위로이고 위안이다. 그리고 희망이다.
그동안 고생했다고, 잘 참았노라고 위로해 주는 무지개다. 그러나 무지개는 이제 더 이상의 괴로움은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다음번의 괴로움도 잘 참으면 자신을 볼 수 있다는 희망을 줄 뿐이다.

서시처럼 순수하고 맑게 살 수 있다면 무지개를 떳떳이 볼 수 있으련만,
그러나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이 몸뚱이가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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