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읽다가 보면 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읽었는데 어떤 때는 왜 이렇지 하는 의문이 드는 대목이 있다. 성경뿐 아니라 어느 책이든 다시 읽으면 못 보던 대목이 눈에 보이는 법이다.
언젠가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이 아담에게 배필을 만들어 주시는 대목이 눈이 들어왔다. 그런데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배필을 만들어 주신다고 하신 후의 하나님의 행동이 이상했다.
바로 하와(이브)를 만들어 주시는 게 아니라 아담의 앞으로 당시 지상에 있는 모든 동물들을 지나가게 하신다. 그리고 아담이 무엇이라 이름을 짓나 보신다. 이름 짓는 일이 다 끝난 후에 하나님은 하와를 만드시고 아담에게 데려다주신다.
배필을 주겠다고 하시고선 하와를 만드시는 대목이 바로 나오는 게 아니라 왜 각종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장면이 나올까? 왜 하나님은 바로 배필을 주시는 게 아니라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짓는 걸 보신 후에 배필을 주실까? 이런 의문이 문득 들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부족한 생각이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제조사가 신제품을 만들면 각종 홍보 마케팅에도 정성을 쏟으나 그 제품의 이름을 짓는 일에도 정성을 다할 것이다. 이름을 잘못 지으면 소비자가 그 제품에 대해 잘못된 선입견을 가질 수 있다. 처음 보는 물건의 이름은 그 물건을 규정하는 정보나 다름없다. 그러니 제품명을 정하는 데 정성을 들이지 않을 수 없다.
제품명은 그 제품의 특징을 잘 나타내야 한다. 제품의 특징이 나타나지 않는 이름은 잘못 지어진 이름이다. 그 특징이 간결하고 정확하게 나타나 있어야 그 제품을 소비자에게 빠르고 효과적으로 인식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러니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한 대상에 대한 온전하고도 정확한 지식이 없으면 안 될 일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그 많은 동물들의 이름을 지었다는 것은 그 동물들에 대해 정확하고도 온전한 지식과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동물들의 이름을 다 지어주었으니 말이다.
이 말은 아담은 어느 대상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 아닐까? 대상에 대한 온전한 인식을 가질 수 있다면 그 대상에 대해 올바른 행동을 할 수도 있다. 즉 상대가 지금 몸살이 난 것을 안다면 그 사람에게 운동하러 가자고는 안 할 것이다. 상대가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음을 안다면 놀이공원에 가자고 안 할 것이다. 상대가 당뇨가 안 좋다면 그 사람에게 설탕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상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지는 것은 그 상대에게 올바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배필을 지어주시기 전에 먼저 아담이 동물의 이름을 잘 짓나를 보신 것 아닐까? 다시 말해 아담이 배필을 맞이할 자격이 되는지를 보신 게 아닐까 한다.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을 보시고 아담이 배필을 맞이할 자격이 되는지 시험해 보신 것일 수 있고, 아니면 배필을 맞이할 훈련을 시키신 것일 수도 있다. 어느 경우건 이름을 짓는 능력, 즉 그 대상의 특징을 올바로 볼 줄 아는 것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성경의 이 이야기를 통해 이름 짓기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이름 짓기 중요성이 있다면 이름을 부르는 중요성도 있다. 우리는 통상 아무렇게나 이름을 부른다. 아니 아예 이름을 부르지도 않고 '야', '어이', '자기' 등이 보통명사로 부르는 일이 많다. 그 사람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로 사람을 부른다. 보통명사로 부르는 사람이 어떻게 '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심지어 가족에게도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로 부르는 일이 많다. 보통명사가 아닌 고유명사로 보를 때에야 나는 '그 사람'을 부르는 것이다. 이름을 짓는 일도 고귀한 일이고 이름을 부르는 일도 고귀한 일이다. 남녀의 역사, 곧 세상의 역사는 이름을 짓는 것에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