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 혹은 상대적 가치 기준?
현시대는 상대적 가치 기준의 시대다. 어떤 일에서든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는 입장이다. 이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영향이라 볼 수 있다. 1800년대 후반 산업 발달의 영향으로 과거의 가치 기준이 아닌 변화하는 시대에 맞는 새로운 가치 기준에 대한 희망이 있었다. 이른바 모더니즘이다.
그러나 두 번의 세계 대전으로 모더니즘에 대한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고 다시 시작하자는 의미에서 기존의 것을 새롭게 바꾸는 모더니즘이 아닌 모든 것을 부정하고 새로이 건설한다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발전하게 됐다.
모든 기준을 없애고 제로에서 시작하니 어떤 의견이든 나름의 타당성을 인정받게 된다. 그러다 보니 현대 사상은 과거엔 맞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안 맞고, 여기선 맞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틀릴 수 있다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이것이 상대주의다.
다양성의 인정이란 결국 상대주의의 인정이라는 말과 같다. 그럼 상대주의는 과연 좋은 것인가?
물론 좋은 면도 있다. 소외된 계층과 조직에서의 개인의 인권을 높인 긍정적 측면이 이다. 그러나 거기까지. 포스트 모더니즘은 사실상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가치 기준의 파괴는 좋은 것인가?
그러다 보니 지금의 시대는 오히려 역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가치 기준의 파괴 말이다.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으니 질서가 없어졌다. 이는 흡사 신호등이 파란불과 빨간불로 계속 바뀌는 것과 같다. 그리되면 차나 사람이나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거나 아니면 뒤어이게 된다. 어느 것이건 좋지 않다. 지금 시대 포스트 모더니즘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상대적 기준 속의 절대적 기준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상대적 가치 기준에도 결코 없앨 수 없는 절대 기준이 숨어 있다. 이 기준을 빼면 상대적 가치 판단도 폐기 처분될 수밖에 없다. 상대적 가치 기준 속에 있는 절대 기준은 바로 '인간 사랑'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상대적 가치 판단은 결국 인간을 사랑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세계 대전의 절망에서 다시금 희망을 길어 올리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즉 인간 사랑을 다시금 실현시키려 하는 시도였다.
따라서 아무리 포스트 모더니즘이라 해도, 아무리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 해도 그 안에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 인간 사랑이라는 절대 가치가 있다.
그럼 인간 사랑이면 다 되는가? 포스트 모더니즘의 인간 사랑은 그 근본이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다. 즉 진화론적이라 할 수 있고, 인본주의라 할 수 있다. 인간이 주인 되는 세상의 인간 사랑이다. 즉 종교성이 없다.
그러나 진정한 인간 사랑은 종교성에 있다. 창조주와 피조물로서의 인간 사랑이 아니면 그 인간 사랑은 허상일 뿐이다. 왜일까?
진정한 인간 사랑의 힘은 어디서 오는가?
인간이 주인이라는 인간 사랑은 결국 가치의 혼란일 수밖에 없다. 모두가 각기 다른 인간이니 각기의 방식으로 인간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이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내가 원하니 네가 피해를 입어도 상관없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쉬운 예로 불륜도 동성애도 모두 옳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사랑의 근본이 종교에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인간의 주인 되는 창조주의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다른 인간을 해하거나 없신 여길 수 조차 없다. 그래서 종교적 인간 사랑이 되어야 진정한 인간 사랑을 이룰 수 있다.
혹자들은 창조주가 있다는 것을 인간적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일이라는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니다. 우리가 대기업에 소속되어 있다면 자부심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창조주에 속해 있다는 믿음이야 말로 인간적 자존감을 최대로 지킬 수 있는 근원이 된다.
이러한 사상이야 말로 인간의 천부인권을 인정하게 되는 가장 높은 권위를 인정받고 보호받을 수 있는 장치이다.
그러므로 이제 세계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종교로 돌아가야 한다. 종교로 돌아가는 것이야 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그리고 인간끼리의 평등과 공평을 찾을 수 있는 길이다.